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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미네 가즈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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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미네 가즈히코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와 외야수, 지명 타자로 활약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오릭스 브레이브스,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거쳐 한신 타이거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86년 56경기 연속 출루, 1987년 6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1990년에는 타점왕을 차지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코치, 감독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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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미네 가즈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시미네 가즈히코
원어 이름石嶺 和彦 (いしみね かずひこ)
출생일1961년 1월 10일
출생지오키나와현 나하시
이시미네 가즈히코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시절, 2011년 8월 28일)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시절 (2011년 8월 28일)
선수 정보
175cm
몸무게80kg
포지션좌익수, 포수, 지명 타자
투구/타석우투/우타
프로 입단1978년 (드래프트 2위)
첫 출장1981년 4월 6일
마지막 경기1996년 10월 5일
통산 타율0.273
통산 안타1,419개
통산 홈런269개
통산 타점875점
통산 도루13개
선수 경력
구단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1979-1993)
한신 타이거스 (1994-1996)
수상 경력
주요 수상퍼시픽 리그 타점왕 (1990년)
퍼시픽 리그 베스트 나인 (1986년, 1987년, 1990년)
NPB 올스타 (1986년, 1987년, 1990년, 1991년)
감독 및 코치 경력
구단주니치 드래건스 (2004-2011)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2)
오릭스 버펄로스 (2013)
고양 원더스 (2014)
kt 위즈 (2015)
에나지크 (감독)

2. 프로 입단 전

이시미네 가즈히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나하 카프'라는 소년 야구팀에서 야구를 시작했다.[58] 투구 동작이 간결하여 포수로 기용되었지만, 투수를 동경했다고 한다.[58] 초등학교 6학년 때 팀은 오키나와현 대회에서 준우승했고, 이시미네도 포수로서 주목받았다.

오키나와 현립 도미구스쿠 고등학교에서는 사이 히로요시 감독의 지도 하에 맹연습을 했고, 시모지 가쓰하루를 에이스로 한 팀에서 2학년 때 4번 타자를 맡아[59] 선발 대회에 출전했다. 하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8강까지 진출했다. 3학년 때는 춘계 선발 대회 1차전에서 패했지만, 하계 선수권 대회에서 다시 8강에 진출했다. 고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197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2순위 지명을 받아 추첨으로 한큐가 협상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사이 감독은 사회인 야구팀 프린스 호텔행을 권했고, 이시미네와 부모는 도시바나 닛폰 석유에서 무릎 치료를 희망했다.[61] 결국 오키나와현 출신 스나가와 게이겐의 설득으로 한큐에 입단하기로 결정했다.[61] 계약금은 2500만, 연봉은 240만이었다.[61]

2. 1. 유소년 시절

초등학교 5학년 때 ‘나하 카프’라는 소년 야구팀에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58] 투구 동작이 콤팩트해 포수로서 기용됐지만, 투수를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58] 초등학교 6학년 때 팀은 오키나와현 대회에서 준우승하여 이시미네도 포수로서 주목받게 됐다.

오키나와 현립 도미구스쿠 고등학교에서는 사이 히로요시 감독의 지휘 하에서 맹연습을 쌓았고, 시모지 가쓰하루를 에이스로 내세운 팀에서 2학년이면서도 4번 타자를 맡아[59] 선발 대회(제49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는 우승한 와카야마 현립 미노시마 고등학교와 2차전에서 상대해 0대 10으로 패했다. 하계 선수권 대회(제5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8강까지 진출하였으나 마쓰모토 쇼지와 미야모토 겐지가 소속된 도요 대학 부속 히메지 고등학교에게 3대 8로 패했다.

3학년 때 춘계 선발 대회(제50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1차전에서 패했지만 하계 선수권 대회(제60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와다 유타카가 소속된 지바 현립 아비코 고등학교를 첫 경기에서 연장 끝에 승리하여 다시 8강에 진출했다. 이시미네 자신은 고시엔 대회에서의 첫 홈런을 때렸으나 오카야마히가시 상업고등학교에게 5대 6으로 석패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프로 구단 스카우트가 이시미네의 자택을 찾게돼 최종적으로는 야쿠르트를 제외한 11개 구단의 스카우트가 찾아왔다고 한다.[60] 한편, 경기 중의 몸에 맞는 볼이 원인으로 고교 시절부터 왼쪽 무릎 반월판이 가끔 어긋나게 되면서 심각한 부상 슬럼프에 시달리기도 했다.[60]

결국 197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2순위로 지명받아 추첨에 의해 한큐가 협상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사이 감독은 일찍부터 사회인 야구팀 프린스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권하고 있었고 또 이시미네 자신이나 그의 부모는 도시바나 닛폰 석유에 가서 무릎을 치료하기를 희망하였다.[61] 사이 감독의 희망을 꺾을 수도 없어 진로는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지만 오키나와현 출신의 스나가와 게이겐이 사이 감독을 설득한 일도 있어 12월에 한큐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61] 계약금 및 연봉은 각각 2500만, 240만(모두 추정)으로 그 해의 고졸 선수로서는 최고 금액이었다.[61]

2. 2. 고교 시절

오키나와 현립 도미시로 고등학교에서 사이 히로요시 감독의 지휘 아래 맹연습을 쌓았고, 1977년에는 시모지 가쓰하루를 에이스로 내세운 팀에서 2학년임에도 4번 타자를 맡아[59] 선발 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는 우승한 와카야마 현립 미노시마 고등학교와 2차전에서 만나 0대 10으로 패했다. 하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8강까지 진출하였으나 마쓰모토 쇼지와 미야모토 겐지가 소속된 도요 대학 부속 히메지 고등학교에게 3대 8로 패했다.

3학년 때 춘계 선발 대회에서는 1차전에서 패했지만, 하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와다 유타카가 소속된 지바 현립 아비코 고등학교를 첫 경기에서 연장 끝에 승리하여 다시 8강에 진출했다. 이시미네 자신은 고시엔 대회에서의 첫 홈런을 때렸으나 오카야마히가시 상업고등학교에게 5대 6으로 석패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프로 구단 스카우트가 이시미네의 자택을 찾게 돼 최종적으로는 야쿠르트를 제외한 11개 구단의 스카우트가 찾아왔다고 한다.[60] 한편, 경기 중의 몸에 맞는 볼이 원인으로 고교 시절부터 왼쪽 무릎 반달판이 가끔 어긋나게 되면서 심각한 부상 슬럼프에 시달리기도 했다.[60]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89년 캠프가 시작되면서, 41세의 베테랑이자 아킬레스건 절단의 후유증이 남은 가도타가 외야를 100경기나 소화하는 것은 어렵다고 이시미네는 판단했다.[83] 시즌 중 수비로 인한 무릎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체중을 80kg에서 70kg으로 줄이고, 수비 연습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83] 같은 해에는 경기 직전에 가도타가 자신의 수비 가능 여부를 결정하고 이시미네가 이에 맞추는 방침이 취해져, 이시미네의 지명 타자와 좌익수 선발 출장 횟수는 각각 65회와 63회로 포지션이 일정하지 않았다.[84] 이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지고, 또한 대폭적인 감량도 영향을 미쳐[84] 같은 해에는 블루 선더 타선 중에서 홈런, 타점 모두 팀 4위의 성적으로 마쳤다.

1990년에는 전년도의 반성을 바탕으로, 가도타와 지명 타자 자리를 다투지 않고 좌익수로 출장할 의사를 굳혔으며, 체중도 80kg으로 되돌렸다.[84] 시즌에 들어가자 4월 26일 세이부전부터 4월 30일 긴테쓰전에 걸쳐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타이기록인 4경기 연속 병살타를 기록했지만,[85]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시즌 막바지까지 홈런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활약을 보였다.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2경기 모두 퍼시픽 리그 5번 타자로 선발 출전해 2차전에서는 홈런을 포함한 2안타 2타점의 성적을 남겼다.[86] 최종적으로는 첫 타격 타이틀인 타점왕을 획득했고, 외야수로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23경기에 좌익수로 선발 출장한 수비에서는 리그 최다 보살 14개를 기록했다.[87]

1991년에는 가도타가 다이에로 이적했기 때문에 다시 지명 타자를 맡았다. 7월에는 타율 .338, 6홈런, 21타점으로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80]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는 중간 출전이면서 2경기 모두 4번 타자로 출전하여, 2경기에서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88] 넓은 그린 스타디움 고베로 홈 구장이 이전된 영향도 있어서인지[89] 전년보다 성적은 떨어졌지만, 팀 최다인 85타점을 기록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를 지원하는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92] 1992년에는 모두 다카하시 사토시에 이어 팀 2위인 18홈런, 68타점의 성적을 남겼다.

1993년에는 타격 3개 부문의 성적이 모두 전년보다 올라, 모두 후지이 야스오에 이어 팀 2위인 24홈런, 77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다. 같은 해부터 일본 프로 야구에 도입된 FA 권리를 획득하여, 마쓰나가 히로미, 고마다 노리히로에 이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3번째 케이스로, 11월 7일에 FA 행사를 선언했다.[90] 수년 전부터 다른 구단에서 뛰고 싶었고, 획득할 구단이 있을지 불안하지만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90]

오릭스 이외의 구단과의 교섭이 자유화된 11월 28일, 오치아이 히로미쓰의 이적이 유력한 주니치 구단 대표 이토 가즈마사, 히라노 겐이 퇴단한 세이부 감독 모리 마사아키와 면담했다. 양 구단 모두 연봉은 FA 규약 상한선인 전년 대비 1.5배인 1.02억(추정)을 제시했고, 세이부에서는 좌익수, 클린업 기용을 명시했다.[91] 주니치에서는 나고야 주택 제공과 은퇴 후 주니치 그룹에서 평론가로서 편의를 봐주고, 세이부에서는 간토 지방 이전에 따른 지원금 3000만 제공을 약속했다.[92] 11월 30일, 마쓰나가 히로미와 짐 파치오렉이 빠진 타선을 강화하고 싶은 한신 타이거스 감독 나카무라 가쓰히로와 구단 사장 미요시 가즈히코와 회담하여, 연봉 1.02억과 외야수, 클린업 기용을 약속받았다.[93] 12월 1일, 오키나와현에서 사이 히로요시와 의논했고, 15년간 다카라즈카시에 살면서 자택도 마련했던 간사이 지방을 떠나기 어려웠고, 한신 팬들의 열렬한 응원에 마음이 끌려 12월 2일 한신 입단을 결정했다.[93] 이로써 한신 최초로 연봉 1억 엔을 넘는 선수가 되었다. 오릭스는 이시미네의 등번호 3번을 1997년 크리스 도넬스 입단 전까지 결번으로 했다.[94]

3. 1.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입단 당시에는 신장 174cm, 체중 70kg에 불과한 왜소한 체구였고 스프링 캠프에서 후쿠모토 유타카미노다 고지 등의 강력한 타구를 보고 자신이 빈약하게 느껴졌다고 한다.[62] 그러나 시즌에 들어서자 웨스턴 리그(2군)에서 안정된 타격을 선보이며 105타수 33안타로 타율 3할 1푼 4리, 홈런 3개를 기록하는 등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남겼다.[63] 하지만 왼쪽 무릎 부상으로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10월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 헛스윙을 하다 반달판이 빠지는 부상을 당해 12월에 수술을 받았다.[63]

프로 2년째인 1980년 2월에 퇴원한 뒤, 손상된 반달판을 지탱하기 위해 주변 근육을 단련했다.[64] 웨스턴 리그에서는 무릎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타 중심으로 기용되었고, 82타수 21안타로 타율은 2할 5푼 6리로 낮아졌지만 홈런은 4개로 늘어나 장거리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64] 이듬해 1981년에는 히로시마와의 시범 경기에서 7점 차로 뒤진 9회말에 대타로 출전해 볼넷을 얻어냈고, 이어진 공격에서 타순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돌아온 타석에서 끝내기 3점 홈런을 쳐냈다.[65] 이를 계기로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에게 펀치력을 인정받아 나카자와 신지 등에 이어 이례적으로 5번째 포수로 개막전 1군 엔트리에 포함되었다.[65] 그 해 36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 1푼 4리를 기록했고, 포수로서는 15경기에 출전했다.[66]

1982년에는 6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할 5푼, 홈런 4개를 기록했다. 그 해 시즌 도중에 사사모토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고, 나카자와는 나이 때문에 야마다 히사시의 전속 포수가 되면서 1983년에는 포수로 선발 출전하는 기회가 늘어났다.[66] 그러나 출전 기회가 늘어남과 동시에 왼쪽 무릎에 가해지는 부담도 커져 염증이 자주 발생했다.[66] 시즌 중반에는 트레이너와 상의하여 출전 여부를 결정했는데, 전력 플레이가 불가능한 상황에 싫증이 나서 8월 26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전에 출전을 강행했다.[67] 경기 도중 통증이 심해져 다음날에는 걸을 수도 없을 정도의 부상 슬럼프에 빠졌고, 그 해는 1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후지타 히로마사가 1군 포수로 정착했다.[68]

재활 훈련을 마치고 맞이한 1984년 시즌부터는 외야수로 전향했는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포수를 그만두고 싶었기 때문에 이시미네는 기뻐했다고 한다.[69] 당시 한큐는 중견수·후쿠모토, 우익수·미노다가 주전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좌익수는 야마모리 마사후미 등 세 명이 경쟁하는 등 선수층이 두터웠다.[69] 이 때문에 승격이 어려웠으나, 6월에 미노다가 손목 통증으로 슬럼프를 겪고 지명 타자였던 미즈타니 지쓰오의 부진이 계속되면서 6월 중순에 1군에 합류했다. 그 해 후반기에는 지명 타자로 경기에 출전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타율 2할 4푼, 홈런 6개에 그쳤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6차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 대타로 출전해 6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나, 7차전에서는 야마네 가즈오에게 유격수 땅볼로 잡히며 마지막 타자가 되었다.[70]

1985년에는 조 힉스가 개막 이후부터 지명 타자로 기용되어 이시미네는 대타를 맡았다.[71] 그 해 대타로서 35타수 13안타로 타율 3할 7푼 1리, 퍼시픽 리그 1위에 해당되는 14타점과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인 대타 홈런 6개를 기록했다.[71] 9월에는 타율이 2할대 전반이었던 힉스를 대신해 지명 타자로 기용됐지만, 시즌 대타 홈런 일본 기록[72]을 달성시키기 위해 한동안은 들러리 선수의 대타로 기용됐다.[73] 그 해 지명 타자로서는 77타수 23안타로 타율 2할 9푼 9리의 성적을 남겨[73] 시즌 통산으로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했다.

1986년에는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이시미네를 지명 타자로 기용하기로 결정하고, 야수인 힉스를 대신하는 외국인 선수로 투수인 애니멀 레슬리를 영입했다.[74] 개막전에서는 6번·지명 타자로 선발 출전했으나, 이후 타격이 저조하여 4월 중에는 고바야시와 함께 기용되었다. 하지만 고바야시도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74] 이시미네는 안정감을 회복하며 타격감을 되찾았고, 4월 29일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연속 출루를 시작하여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은 7월 26일 롯데전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며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75] 56경기 연속 출루를 달성했다.[76]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여 타율 3할, 33홈런, 96타점의 활약으로 베스트 나인(지명 타자 부문)에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시즌 중에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시즌 종료 후 간염이 발견돼 1개월간 안정을 취해야 했다.[77]

1987년 1월 말까지 안정을 필요로 하는 상태가 이어지면서, 그 동안은 병원과 아파트만 오가는 생활을 했다.[77] 2월 들어 걷는 것에서부터 조깅, 웨이트 트레이닝, 티 배팅으로 연습 강도를 서서히 높여갔으나, 연습 시간은 하루 30분 정도로 제한되었다.[78] 그러나 5번·지명 타자로서 맞이한 4월 10일 난카이 호크스와의 개막전 첫 번째 타석에서 야마우치 다카노리로부터 2루타를 때려내는 등 4월 한 달간 타율 4할 5푼, 홈런 6개를 기록하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79] 5월 14일에는 퍼시픽 리그 타격 3개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올랐고,[79] 6월에는 타율 3할 1푼 6리, 5홈런, 12타점으로 월간 MVP에 처음으로 선정됐다.[80] 그 해 올스타전에서는 1차전과 2차전에서 퍼시픽 리그 팀의 4번 타자를 맡았고, 3차전에서는 홈런을 포함한 맹타상을 기록하는 등 3경기에서 12타수 6안타 3타점을 기록했다.[81] 9월 2일부터 9월 10일까지는 퍼시픽 리그 역대 5번째 타이 기록인 6경기 연속 홈런을 달성했다. 1987년에는 최종적으로 타율 3할 1푼 7리, 34홈런, 91타점으로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지명 타자 부문)에 선정되었다. 시즌 종료 후 ANA 소속 여승무원과 결혼했다.[82]

1988년에는 4번·지명 타자로서 개막전을 맞이했고, 그 해 8월 14일 롯데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지는 연속 경기 출장이 시작되었다. 타격 3개 부문 성적은 전년보다 조금 낮았지만, 팀 내 1위인 22홈런을 기록했고, 시즌 76타점은 마쓰나가 히로미의 77타점에 이은 팀 내 2위였다. 시즌 종료 후 한큐 브레이브스는 오릭스에 매각되어 팀 이름도 ‘오릭스 브레이브스’로 변경되었고, 난카이 호크스도 다이에에 매각되면서 오사카시에서 후쿠오카시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호크스 연고지 이전의 영향으로 가도타 히로미쓰가 오릭스 브레이브스에 트레이드로 이적했고, 다음 시즌부터 이시미네와 번갈아 가며 지명 타자로 기용되었다. 가도타는 오릭스에 입단한 이후 “이시미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연간 100경기는 외야 수비를 맡겠다”라고 선언했다.[83]

3. 2. 오릭스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 시절

1989년 캠프 시작과 함께, 41세의 베테랑 가도타아킬레스건 절단 후유증으로 100경기 이상 외야 수비를 소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시미네[30] 시즌 중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체중을 80kg에서 70kg으로 줄이고 수비 연습에 적극적으로 임했다.[30] 같은 해, 경기 직전 가도타의 수비 가능 여부에 따라 이시미네의 지명 타자와 좌익수 선발 출장 횟수가 각각 65회와 63회로 일정하지 않아[31] 집중력이 떨어지고, 대폭적인 감량도 영향을 미쳐[31] 블루 선더 타선에서 홈런, 타점 모두 팀 4위에 그쳤다.

1990년에는 전년도의 반성을 바탕으로 가도타와 지명 타자 자리를 다투지 않고 좌익수로 출장할 의사를 굳히고 체중을 80kg으로 되돌렸다.[31] 시즌 초반, 4월 11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이노우에 유지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지만, 4월 26일 세이부전부터 4월 30일 긴테쓰전까지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타이기록인 4경기 연속 병살타를 기록했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시즌 막바지까지 최다 홈런 경쟁을 펼쳤다. 3년 만에 올스타전에 2경기 모두 퍼시픽 리그 5번 타자로 선발 출전, 제2전에서 홈런 포함 2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33] 최종적으로 첫 타격 타이틀인 타점왕을 획득, 외야수로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123경기에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리그 최다 보살 14개를 기록했다.[34]

1991년, 가도타가 다이에로 이적하며 다시 지명 타자를 맡았다. 7월에는 타율 .338, 6홈런, 21타점으로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27]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는 중간 출전임에도 2경기 모두 4번 타자로 출전, 2경기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35] 그린 스타디움 고베로 홈 구장이 이전된 영향으로[36] 전년보다 성적이 떨어졌지만, 팀 최다 85타점을 기록했다. 오프 시즌에는 트레이드를 자원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39] 1992년에는 다카하시 사토시에 이어 팀 2위인 18홈런, 68타점을 기록했다.

1993년에는 타격 3개 부문 성적이 모두 향상, 후지이 야스오에 이어 팀 2위인 24홈런, 77타점을 기록했다. 9월 8일 세이부전에서는 시오자키 테츠야를 상대로 끝내기 2루타를 날렸다. 같은 해부터 NPB에 도입된 FA 권리를 획득, 마쓰나가 히로미, 고마다 노리히로에 이은 NPB 사상 3번째로 11월 7일 FA를 선언했다.[37] 수년 전부터 다른 구단에서 뛰고 싶었고, 획득할 구단이 있을지 불안했지만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37]

3.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93년 시즌 후, 이시미네는 FA 권리를 행사하여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이시미네는 수년 전부터 다른 구단에서 뛰고 싶었고, 이적할 구단이 있을지 불안했지만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37]

11월 28일, 이시미네는 오치아이 히로미쓰의 이적이 유력했던 주니치 구단 대표 이토 가즈마사, 히라노 겐이 퇴단한 세이부 감독 모리 마사아키와 회담했다. 양 구단 모두 FA 규약 상한선인 전년 대비 1.5배인 1.02억(추정)을 제시했고, 세이부에서는 좌익수 및 클린업 기용을 약속했다.[38] 주니치는 나고야 주택 제공과 은퇴 후 주니치 그룹 평론가로서의 편의를, 세이부는 간토 지방 이전을 위한 자금 3000만 제공을 약속했다.[39]

11월 30일, 마쓰나가 히로미와 짐 파초렉이 빠진 타선을 강화하고 싶었던 한신 감독 나카무라 가쓰히로와 구단 사장 미요시 가즈히코가 이시미네와 회담하여 1.02억과 외야수, 클린업 기용을 약속했다.[40]

12월 1일, 이시미네는 오키나와현에서 사이 코기에게 상담을 받았다. 15년 동안 살았던 다카라즈카시에 자택도 마련했고, 간사이 지방을 떠나기 어려웠으며, 한신 팬들의 열렬한 응원에 매료되어 12월 2일에 한신 입단을 결정했다.[40] 이시미네의 입단으로 한신은 처음으로 연봉 1억 엔을 넘는 선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오릭스는 이시미네의 등번호 3번을 1997년 크리스 도넬스가 입단할 때까지 결번으로 했다.[41]

4. 은퇴 이후

이시미네 가즈히코는 입단 초기부터 장타력을 인정받아 10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고, 찬스에 매우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1][51] 타격에는 정답이 없으며, 체형과 근력에 따라 각각 적절한 타격 폼이 있고, 가장 휘두르기 쉬운 형태가 최고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52]

몸을 잘 회전시켜 강타하는 인코스 타격에 대한 평가가 높았지만, 특별히 의식해서 연습한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고 한다.[51] 인코스 공은 몸 앞에서 쳐야 한다는 일반론에 대해서는 파울이 되기 쉽다며 부정적이며,[51] 오히려 그립 엔드가 헤드보다 앞에 있는 위치까지 끌어당겨 잡고, 거기서부터 몸을 회전시키는 감각으로 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51] 본인은 가운데에서 약간 인코스 쪽에 가까운 코스를 좋아했으며, 인코스라면 다소 볼 기미가 있어도 좌익선으로 타구를 날릴 수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51] 인코스로 슈트를 주저하며 던지는 투수를 특히 잘 상대했다고 한다.[52] 한편, 프로에서 통용되기 위해서는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관계없이 실제로 던져오는 볼에 대한 대응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상대 투수의 구종이나 경기 상황에 따라 타격을 생각했다고 한다.[52]

5. 플레이 스타일

이시미네 가즈히코는 무릎 부상으로 수비는 잘 하지 못했지만, 포수 경험을 바탕으로 간결한 동작에서 나오는 송구는 제구력과 속도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87] 보살에 강점이 있어 1990년에는 퍼시픽 리그 최다인 14개를 기록했고, 그 중 8개가 홈 경기에서 나왔다.[87] 통산 도루는 13개로 적었지만, 통산 1065도루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도 단 한 번밖에 성공하지 못한 홈스틸을 두 번이나 성공했다.

5. 1. 타격

무릎 부상의 영향으로 수비에서는 능숙하지 못했지만, 포수 경험을 살린 간결한 동작의 송구는 제구력과 속도에 정평이 있었다.[87] 보살 플레이를 잘해서 1990년에는 퍼시픽 리그 최다인 14개를 기록했는데, 그 중 8개가 홈 경기에서 나왔다.[87] 통산 도루 개수는 13개에 불과했지만, 통산 1065개의 도루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가 한 차례밖에 성공하지 못한 홈스틸을 두 번이나 성공시켰다.

지명 타자로 기용된 경기에서는 소속팀 수비 때 라커룸에서 센트럴 리그의 프로 야구 중계를 보거나 신문 기자와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고, 자신의 타순이 돌아올 때쯤 벤치로 돌아갔다.[87][102] 이러한 스타일은 지명 타자를 맡은 일본인 선수 대부분이 수비 때 집중력 유지를 힘들어하던 1975년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는 이례적인 방식이었다.[103] 1983년에 무릎 부상을 겪은 후 지명 타자로 출전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자신은 타격에 전념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었다고 한다.[104]

5. 2. 수비·주루

무릎 부상의 영향도 있어 수비에서는 잘하지 못했지만 포수의 경험을 살린 콤팩트한 모션의 송구는 컨트롤과 스피드에 정평이 나있다.[87] 보살 플레이가 좋아서 1990년에는 퍼시픽 리그 최다인 14개를 기록하였는데 그 중 8개가 홈 경기에서 나온 것이다.[87] 통산 도루 개수는 13개에 불과했지만 통산 1065개의 도루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가 한 차례 밖에 성공시키지 못한 홈스틸을 두 차례나 성공시켰다.

5. 3. 지명 타자

무릎 부상의 영향으로 수비는 잘하지 못했지만, 포수 경험을 살린 간결한 동작의 송구는 제구력과 속도에 정평이 있었다.[87] 보살 플레이를 잘해서 1990년에는 퍼시픽 리그 최다인 14개를 기록했는데, 그 중 8개가 홈 경기에서 나왔다.[87] 통산 도루 개수는 13개에 불과했지만, 통산 1065개의 도루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가 한 차례밖에 성공하지 못한 홈스틸을 두 차례나 성공시켰다.

6. 상세 정보

오릭스 | 364642391121850000400150.214.283.429.711198266847691921435100010502221.250.313.461.7741983591441291529406511801311001283.225.284.395.679198444120108132560649140000705199.231.308.454.76219857717414922457014943400002134283.302.402.6311.0331986126510454621361923325896311350526411.300.369.568.9381987127543495651572403428391100337486910.317.372.572.9441988128515469541391802222376011433885613.296.350.475.8261989130534487551352912022677110342526913.277.335.464.7991990130545473721298137250106020664628316.273.358.529.88619911305534906313228321229850101148245318.269.333.467.8001992130549506561351701820668220237246617.267.321.407.7281993130549495561352122423277410348336515.273.339.469.8071994한신 | 130502467391151711718577110922248214.246.281.396.6771995973182872469171911533110721134216.240.292.401.69319962670626100021680000701151.161.257.258.515통산: 16년 | 156657565189614141921813269247087513126524564153776160.273.335.476.811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이며, 한큐(한큐 브레이브스)는 1989년에 오릭스(오릭스 브레이브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다음은 이시미네 가즈히코의 포수 수비 기록이다.

연도경기도루 시도허용 도루도루자도루 저지율
1981151192.182
198214440.000
19833923167.304
통산6838299.237



이시미네 가즈히코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연도등번호
1979년 ~ 1982년55
1983년 ~ 1987년, 1994년 ~ 1996년29
1988년 ~ 1993년3
2004년 ~ 2011년75
2012년76
2013년 ~ 2014년70
2015년90
2016년 ~55


6. 1. 수상·타이틀 경력

石嶺 和彦|이시미네 가즈히코일본어는 타점왕 1회 (1990년), 베스트 나인 3회(지명 타자 부문: 1986년, 1987년, 외야수 부문: 1990년), 월간 MVP 2회 (1987년 6월, 1991년 7월)를 수상했다.[2]

6. 1. 1. 타이틀

石嶺 和彦|이시미네 가즈히코일본어는 1990년에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2]

6. 1. 2. 수상

6. 2. 개인 기록

이시미네 가즈히코는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남겼다.

; 주요 기록

; 기타 기록

기록내용
연속 경기 홈런6경기 (1987년 9월 2일 ~ 9월 10일)[1]
연속 경기 출루56경기 (1986년 4월 29일 ~ 7월 25일)[1]
연속 경기 출장894경기 (1988년 8월 14일 ~ 1995년 7월 12일) ※당시 역대 5위[1]
시즌 대타 홈런6개 (1985년)[1]
올스타전 출장4회 (1986년, 1987년, 1990년, 1991년)[1]


6. 2. 1. 첫 기록

6. 2. 2. 기록 달성 경력

; 첫 기록

; 주요 기록

; 기타 기록

6. 2. 3. 기타

기타 기록


6. 3. 등번호

연도등번호
1979년 ~ 1982년55
1983년 ~ 1987년, 1994년 ~ 1996년29
1988년 ~ 1993년3
2004년 ~ 2011년75
2012년76
2013년 ~ 2014년70
2015년90
2016년 ~55


참조

[1] 웹사이트 Kazuhiko Ishimine https://www.baseball[...] 2020-05-09
[2] 블로그 豊岡マッシー「ウチナーンチュin東京」2012年4月10日付記事『宮古が生んだ石嶺和彦』 http://toyobox.blog.[...]
[3] Youtube 【最終回】慶彦さんのバッティングを完コピ!これって何ですか?【松永浩美】【高橋慶彦】【プロ野球OBに会いに行く】⑫ https://www.youtube.[...]
[4] 웹사이트 元オリックス石嶺和彦氏 社会人エナジック監督2季目 個性伸ばし全国に照準 http://www.okinawati[...] 沖縄タイムス 2018-03-12
[5] 서적 ヴェテラン 文春文庫
[6] 서적 ヴェテラン
[7] 서적 ヴェテラン
[8] 서적 ヴェテラン
[9] 서적 ヴェテラン
[10] 서적 ヴェテラン
[11] 서적 ヴェテラン
[12] 서적 ヴェテラン
[13] 서적 ヴェテラン
[14] 서적 ヴェテラン
[15] 서적 ヴェテラン
[16] 서적 ヴェテラン
[17] 웹사이트 1984年の日本シリーズ 第7戦 NPB公式記録 http://bis.npb.or.jp[...] NPB
[18] 서적 ヴェテラン
[19] 기타
[20] 서적 ヴェテラン
[21] 서적 ヴェテラン
[22] 기타
[23] 서적 ヴェテラン
[24] 서적 ヴェテラン
[25] 서적 ヴェテラン
[26] 서적 ヴェテラン
[27] 웹사이트 パ・リーグ月間MVP記録 http://www.pacific.n[...]
[28] 웹사이트 1987年オールスターゲーム NPB公式記録 http://bis.npb.or.jp[...] NPB
[29] 서적 ヴェテラン
[30] 서적 ヴェテラン
[31] 서적 ヴェテラン
[32] 웹사이트 パ・リーグ 個人打撃連続記録 http://www.pacific.n[...]
[33] 웹사이트 1990年オールスターゲーム第2戦 NPB公式記録 http://bis.npb.or.jp[...] NPB
[34] 서적 ヴェテラン
[35] 웹사이트 1991年オールスターゲーム NPB公式記録 http://bis.npb.or.jp[...] NPB
[36] 서적 ヴェテラン
[37] 뉴스 朝日新聞 1993-11-07
[38] 뉴스 朝日新聞 1993-11-29
[39] 웹사이트 スポニチ 日めくりプロ野球09年11月 https://web.archive.[...]
[40] 뉴스 朝日新聞 1993-12-03
[41] 기타
[42] 웹사이트 2011年度セントラル・リーグ チーム打撃成績 http://npb.jp/bis/20[...]
[43] 웹사이트 2012年度 横浜DeNAベイスターズ・コーチングスタッフ http://www.baystars.[...] 横浜DeNAベイスターズ 2011-12-16
[44] 웹사이트 2012年度セントラル・リーグ チーム打撃成績 http://npb.jp/bis/20[...]
[45] 뉴스 オリックスに石嶺DeNAコーチが入閣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2-10-25
[46] 뉴스 オリ石嶺C、低迷した責任取り退団へ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3-10-14
[47] 웹사이트 T―岡田にキング奪回指令「30本くらいクリアできる https://web.archive.[...]
[48] 뉴스 オリックス 石嶺打撃コーチが退団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3-10-14
[4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15-05-04
[50] 뉴스 エナジック監督就任 石嶺和彦氏に聞く チームに競争意識 https://ryukyushimpo[...] 琉球新報
[5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9-09-06
[5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9-09-06
[53] 서적 ヴェテラン
[54] 서적 ヴェテラン
[55] 서적 ヴェテラン
[56] 서적 ヴェテラン
[57] 웹인용 元オリックス石嶺和彦氏 社会人エナジック監督2季目 個性伸ばし全国に照準 http://www.okinawati[...] 오키나와 타임스 2018-03-12
[58]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59]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0]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1]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2]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3]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4]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5]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6]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7]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8]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69]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70] 웹사이트 1984년 일본 시리즈 경기 결과(7차전) http://bis.npb.or.jp[...] 일본 야구 기구 홈페이지
[71]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72] 문서
[73]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74]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75] 문서
[76]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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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웹인용 퍼시픽 리그 월간 MVP 기록 https://web.archive.[...] 2011-04-24
[81] 웹사이트 1987년 올스타전 경기 결과 http://bis.npb.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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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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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88] 웹사이트 1991년 올스타전 경기 결과 http://bis.npb.or.jp[...]
[89]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90] 뉴스 아사히 신문 1993-11-07
[91] 뉴스 아사히 신문 1993-11-29
[92] 웹사이트 관련 기사 http://www.sponichi.[...] 스포니치 2009-11-01
[93] 뉴스 아사히 신문 1993-12-03
[94] 문서
[95] 뉴스 ja|オリックスに石嶺DeNAコーチが入閣 http://www.nikkanspo[...] 닛칸 스포츠 2012-10-25
[96] 뉴스 ja|オリ石嶺C、低迷した責任取り退団へ http://www.daily.co.[...] 데일리 스포츠 2013-10-14
[97] 뉴스 ja|オリックス 石嶺打撃コーチが退団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2013-10-14
[9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15-05-04
[99] 뉴스 ja|エナジック監督就任 石嶺和彦氏に聞く チームに競争意識 류큐 신보
[100]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9-09-06
[10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9-09-06
[102]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103]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104] 서적 에비사와 야스히사(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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